한국의 역사가 곳곳에 베어있는 한국같은 대마도여행 칼럼

한때 대마도는 조선의 땅이었다.



우리나라 부산에서 남쪽 해상으로 약50키로 거리에 위치한 일본의 대마도!

약 1시간10분-30분이면 배를 타고 히티카스항(북쪽)에 또는 이즈하라항(남쪽) 도착이 가능하며 맑은날에는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의 한국전망대에 올라서서 보면 부산쪽과 남해안의 경관을 볼 수 있고 부산쪽 태종대나 용두산공원에서도 날씨가 좋으면 대마도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마도 와니우라 전망대주탑은 우리건축모양인 팔각정형태로 지어저 친근감이 더하고 주변에 넓은 잔디밭과 앞에 펼처지는 비취빛 바다의 파도는 그시원함을 더해준다.

그옆에 아름다운 고운모래 해변인 청결한 미우다 해수욕장은 동남아 해변 이상의 멋진 낭만의 운치를 가지고있다.

대마도의 아소만을 360도로 조망할수있는 에보시다케 전망대를 오르면 아소만에 자리잡은 예쁜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장관의 비경으로 펼처지고있어 이를 배경으로한 사진촬영 포인트로 관광객들에게 각광받고 있는곳이다.

인근 358미터의 가마자케 전망대에는 대포와 막사가 그대로 남아있어 대마도가 동아시아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증거하고 있는곳이다.

600년전에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다녀간 역사루트가 보존되어있는데 통신사행렬을 성대하고 화려하게 맞이하던 고려문과 이를 기리는 조선통신사비가 보존되어있어 과거 조선과 대마도의 우호적 선린관계를 엿볼 수 있으며 우리 선조들의 당당한 외교적 발자취를 느낄수있는곳이라 할것이다.

고종의 막내딸인 덕혜옹주와 대마도 다케유끼백작이 어쩔수 없는 정치적인 정략적 결혼을 하였는데 그 한서린 고향에대한 애잔한 설움과 삶의 애환이 묻어나오는 덕혜옹주 결혼봉축 기념비앞에 서면 마음이 숙연해지게된다.

이즈하라에 있는 수선사는 한국의 비구니 법묘스님이 건너가 창건한 절로 유명하고 구한말 항일운동의 선구자이며 대유학자이셨던 최익현선생이 의병운동을 일으켜 싸우다 대마도로 잡혀가 1906년에 현지에서 옥사하셨는데 이절로 유해가 안치되었고 또한 최익현순국비가 세워저있어 한국인이 꼭 찾아가서 참배하는 애국적 성지가 되고있다할것이다.

1419년 이종무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이 대마도 정벌 길에 오릅니다. 세종대왕의 명을 받고 대마도를 근거지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서였다

세종 원년 5월, 명나라로 향하던 왜선 40여 척이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충청도 서천으로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고 양민을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왜구들은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충청 수영의 전선(戰船) 7척을 불태우고 황해도 해주까지 올라온다. 이를 가만히 두었다가는 사회혼란이 극심해 질 것을 우려한 조선 정부는 대마도를 기습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대마도는 옛날부터 우리 땅이었다’로 시작돼 ‘땅이 막혀 궁벽하고 좁고 더러운 곳이어서 왜적들이 살게 내버려 두었더니 도적질을 일삼으며…’로 이어지는 정벌 포고문은 당시 조선 정부의 강력한 국방 의지를 짐작케 해주고 있다할것이다.

정벌군은 삼군 도체찰사 이종무 장군의 지휘아래 전선 227척, 군사 1만 7천 명으로 구성되어 6월 중순 경상도 거제 앞바다 견내량에 집결한다. 6월 19일, 거제를 출발한 조선 원정군은 하루 만인 20일 정오 무렵 대마도 아소우(淺茅) 만에 도착, 이곳을 점령한다. 조선군은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하지만, 그가 듣지 않자 상륙작전을 결행한다. 조선군은 투항에 불응하는 왜구 104명을 죽이고 21명을 생포하였으며, 대소 선박 129척, 가옥 2천 여 호를 소각하고 왜구에게 붙들려온 조선인 8명과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하는 전과를 올리게된다. 하지만 조선군도 왜구의 기습을 받아 10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조선군이 목책을 설치하는 하고 주요 길목을 차단하는 등 장기 주둔할 기세를 보이자 대마도 도주(島主)는 왜구의 단속을 약속하면서 화해를 요청한다. 때마침 닥친 장마와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우려한 조선군은 대마도주의 화해 제의를 받아 들여, 7월 3일 거제로 개선한다

그 후 1436년, 흉년으로 식량사정이 어려워진 대마도주는 조선 정부에 대마도를 조선에 편입시켜 줄 것을 간청하고,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하고 도주를 태수에 봉했다. 임진왜란 이후 2백 여 년 동안 이어진 조선 통신사의 중간 기착지 역할도 한 대마도가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편입된 것은 1868년, 메이지 일왕 때의 일이었으니 한때는 대마도가 우리의 정식영토이었음을 역사자료에 당당히 기재되었음을 상기해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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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마도에는 2개의 명산트레킹 코스가 있는데 먼저 518미터의 시라다케산으로 4시간정도의 트레킹코스가 개방되어있고 3시간정도의 트레킹코스인 581미터의 아리아케등반 코스가 열려있어 전국 산악회및 등산 동호회의 단체산행 진행코스로 현재 년중 크게 인기를 끌고있는중이다.

출발일정에 있어 대부분 부산여객터미널 왕복으로 진행하고있고 최근에는김포공항에서 대마도공항 왕복으로 경비행기 왕복노선 으로도 진행중이다.

한국의 문화적 정서와 애환이 곳곳에 서려있는 친근한 대마도여행에대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의 대마도에서 한국의 역사적 정서가 그대로 녹아있는 그 멋진 정취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어도를 중국정부와 담판해야한다고 중국이 주장하고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외처대는때에 이스라엘처럼 군사강국 외교강국이 되어 주변국에게 함부로 농락당하지 않도록 철저히 자기관리에 나서야할 시점이다.

럼리스트겸 (주)월드라이프여행사 대표이사 김병민

070-8244-4440/ 010-5461-3247

Posted by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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