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인으로서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를 지켜낸 불멸의 자기헌신 영웅들

이순신장군--안중근의사-유관순 열사--윤봉길의사--한주호준위

(대한국인의 역사를위해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켜낸 수많은 애국열사와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대한민국의 번영이 있었음을 우리는 가슴으로 간직하고 자각해야 할것이다)

전국민을 경악시킨 천안함 침몰에 따른 실종된 장병 46명을 구하려고 45미터 바다밑을 3번이나 잠수하다 순직한 UDT대원의 전설 53세의 영결식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나만의 심사는 아닐것이다. 軍人本分 爲國獻身(안중근의사 묵언) 국가를 위해 자신을 던진 그의 한결같은 임무완수를 위한 애국적 헌신은 대한민국 군인의 영원한 표상이요. 先進强軍의 투철한 정신적 사명감으로 영원히 자랑스럽게 전승될것이다.

불운한 역사의 고비마다 대한국인의 위대성을 세계만방에 과시하며 멸망하지 않고 조국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준 숭고한 불멸의 역사의 투혼들에게 이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무릎을 꿇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머리숙여 감사의 큰절을올리고 또올리고자 한다....

일본놈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우리 한반도에 처들어와 끈질기게 우리국토와 우리 국민을 유린하였다. 현재 까지도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하며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일본(이지만 하또야마 정권에서 최근 동북아경제연합 주창하는 안의사의 동양평화론 컨셉과 일치)과 전세계 패권의 야심을 나타내고있는 중국을 (안중근의사가 죽음을 앞둔 여순감옥 안에서 주창한 동양평화의 공존번영이라는) 21세기 새로운 제도권적 틀안에 녹여내야하는 우리의 균형자적이며 역사적 사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수 없다.

이순신장군은 오해와 모함을 받고 크나큰 고초를 겪은후 전장터로 다시돌아와 12척의 낡은 배를 수리하여 이를 이끌고 해전에서 일본의 적선 133척을 괴멸하였다.

그야말로 놀라운 정신적 투혼과 탁월한 전략없이는 23전 23전승을 이룰수 없었을것이다.

32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변방만을 돌아다니며 지키다가 당시의 나이로는 퇴역할 47세에 제독이되어 지금도 해군사에 전세계가 놀라는 업적으로 평가되며 나라를 지켰낸 국구의 영웅이었다.

안의사도 31·세의 젊은나이에 동양침략의 원흉인 이또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름으로 당당하게 처던하였다. 그의 사상과 정신은 당시 감옥의 일본간수와 일본 변호사까지 감동하여 대대손손으로 그를 기리고 있을 정도로 고결한 인품과 그 정의적 자세는 존경을 넘어 신의 경지에서 칭송받아 마땅하다 할것이다. 대한제국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참살하여 태워죽인 일본국에 대한 당당한 응징을 보여준 안의사의 見利思義 見爲受命(불의를 보면 목숨을 던진다) 정신과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의 위기에 깊은 고민이 있어야야 한다)의 애국적 헌신의 행동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절절한 메시지가 아닐수 없다할것이다. 우리는 안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유해를 빨리 찾아와 번영된 조국의 품안으로 모셔오는데 총력을 펼처야 할 시점이다.

3.1운동 당시 유관순열사는 서울에 있었다.

유관순 열사는 3월5일 만세운동에 처음 참가하였고,

일제가 휴교령을 내리자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3월 8일 고향인 병천으로 내려온 것 입니다.거기서 유열사는 어린 소녀로 보기에는 놀라운 투지를 발휘한다.

병천 지역에서 이종성이란 분이 만세운동을 계획했는 데 체포당하자 어린 유관순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린 유관순은 무려 20일간 근처 도시의 유림(유학자)들을 찾아 다니며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설득하기도 했는데 당시 열사가 걸은 거리가 수백리에 달하였다.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은 그해 4월 1일(음력 3월 1일)에 있었으며

그 시위에서 열사의 부모님은 모두 순국하였고,

열사는 체포되어 공주 법원에서 3년 형을 받았다.

열사는 항소하여 자신의 투쟁이 정당한 투쟁 임을 당당하게 주장하였으나

항소가 기각되자, 이에 분개한 열사는 법정에서 판사에게 의자를 집어 던지는 당찬 기개를 보여주았다 .결국 일제 법정은 법정모독죄까지 적용하여 형을 7년으로 늘려버렸다.

그 과정에서 수 많은 고문을 당하고 몸이 쇠약해져 17살의 어린 나이로 옥중에서 사망한 것이다.당시 사망 의료기록은 자궁파열이라니 당시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지 않을수 없다.(네이버 자료 참조)

17세의 어린나이에 국가의식과 역사의식으로 나라의 정체성을 찾기위해 전개한 유관순 열사의 조국에 대한 헌신=그 정의롭고 당찬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를 숙연케한다.

윤봉길의사는 24세의 젊은 나이로 조국에 그위대한 목숨을 헌정하였다.

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게기로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서. 일본군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의 지휘하에 중국 남부를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일본 천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天長節)과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한것이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하였다.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金弘一)의 도움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폭탄(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였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는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重光癸] 등이 중상을 입었다.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2. 11. 20). 그리고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蔣介石)은 당시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일제에 의해 합병된 조국현실이 안타까워 고향에서 농민계몽·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펴나간 윤의사의 사회 역사의식을 존경하지 않을수 없으며 당시 4억이 넘는 중국인이 일제의 침략으로 납작하게 엎드려 숨죽이고 있을때 대한의 남아인 윤봉길의사가 과감한 투혼적 실천행동으로 나아가 천황 생일을 축하는 천장절 기념식장에 폭탄투척으로 일본의 동양침략을 응징한것은 대한국인을 유린하고 동양침략으로 나아간다면 죽음을 면치못한다는 장쾌한 세계적인 메시지가 아닐수 없다할것이다

상해 홍구공원(노신공원)에는 당시 의거현장에 돌 기념비석이 있고 조그만 사당이 보존되고 있어 한국인들은 갈때마다 참배하고 그뜻을 기려야 할것이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백령도 천안함 침몰사건에 솔선적으로 참여하여 해저 45미터 잠수에 3번씩이나 투입하여 젊은 장병들의 구조를 적극적으로 시도하다가 조국에 그목숨을 바친 한주호 준위의 그 책임감과 헌신적 희생이 있기에 조국 대한민국은 힘차게 번영하고 있음을 오늘 우리 모두는 역사의식과 국가의식으로 무장하며 언제든지 조국을 위해 산화할수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수 있도록 제도와 환경을 만들면서 옷깃을 여며야한 할것이다.

전국의 각대학에는 민주화를위해 목숨을 바친 기념물들은 많이 조성되어 있으나 전쟁터에서 산화한 젊은이들을 기리는 기념물이나 박물관은 거의 없다.

춘천 농공고가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625당시 학도병으로 나가 장렬하게 전사한 182명의 선배를 기리는 기념탑을 2010.3.22일자에 세웠다는 보도가 있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구내에 메모리얼교회 안에도 1차대전 373명, 그후 2차대전, 625전쟁, 베트남전에서 목숨바친 동문들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할것이다.

미국은 단1명의 전사한 자국 군인의 유해라도 지구 끝까지 찾아가 발굴하여 미국내의 국립묘지로 가져가기위해 지난 전장터를 오늘도 찾아나서 땀흘리며 발굴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팍스 아메리카를 위해 미국의 젊은이들이 언제든지 기꺼이 죽을수 있다는 당당한 자세와 투혼을불러 일으키는 것이며 이는 미국의 놀라운 저력이 아닐수 없다할것이다.

과거 정부수립당시일제의 관료들을 대거 발탁하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광복을 위해 헌신한 분들과 남겨진가족들에 대한 국가적 예우가 없었던 관계로많은 애국자들이배를굶고 학교도 못다니는 처참한 실태에 당시 놓여 있었다 할것이다.

진정한 희생에 대한 끝없는 국가 사회적인 감사정신과 남겨진 가족에 대한 그 실체적 보훈적 보상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영원한 역사성과 정체성을 위한 길임을 우리 모두 다시한번 곰곰이 가슴으로 느껴보며 깊게 생각할 시점이 아닐수 없다.

칼럼리스트 김병민

Posted by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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